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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글자료]플랜75로 바라본 돌봄과 인권

인권교육온다 2025. 10. 30. 00:11

플랜75 포스터

                                                                     

 '외로움'이라는 담장 '돌봄'으로 넘어가자 

                                                                                                                            온다상임활동가 와플                                                                    

당신의 죽음을 국가가 지원합니다.’

 

일본의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플랜75’2024년 한국에 개봉했다. ‘플랜75’는 초고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5세이상 노년이 조력사를 신청하도록 만든 가상의 국가 사업명이다. 영화는 돌봄과 연관된 다른 상황에 처한 등장인물을 통해 플랜75가 미치는 사회적 파장을 조명한다.

주인공 미치는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78세 노동자다. 그녀는 자신의 직장동료가 일터에서 쓰러지자 비슷한 나잇대의 청소노동자들과 해고를 당한다. 가족도 재산도 없는 미치는 어떻게든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다. 결국 그녀의 선택지는 플랜75를 향한다. 영화는 초고령사회에 벌어지는 국가정책의 문제가 노년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연루된 일임을 보여준다. 영화나 소설이 현실을 반영한 허구일수 있지만 때론 누구보다 현실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플랜75는 현재를 돌아보고 실현가능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국가정책의 방향성에 따라 인간의 존엄이 좌우되는 상황은 영화 밖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한국과 코로나 그리고 외로움

2019년 코로나19가 전지구적 재난으로 도래했다. 코로나 초기 첫 사망자가 발생한 청도 대남병원에 코호트 격리가 시행되었다. 그곳은 남겨진 사람들은 정신병동에 머무는 갈곳없는 정신장애인이었다. 시설에 거주하는 노년이나 장애인은 마스크를 써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그들을 돌보는 종사자들은 제대로 된 수당을 받지 못한채 기약없는 시간을 견뎌야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따라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재난 속 돌봄의 부재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렸다. 타의 모범을 보이는 k방역의 수면 아래는 모두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갇혀지낸 시간이었다. 외로움은 돌봄의 부재로 나타났지만 사회적고립의 원인을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서점 가판대에 오른 수많은 외로움에 관한 서적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발표한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dex)’중 꼴찌를 차지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고립의 시대>(웅진지식하우스)저자이자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움이 타인을 이해와 공감으로 이끌기보다 주변을 경계하고 위협요소를 찾게 한다고 했다.  고독은 자발적으로 자신과 독대하는 창조적인 시간이지만 외로움은 선택하지 않은 환경으로부터 밀려드는 감정이다. 버림받은 느낌인 외로움은 불현듯 찾아온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외로움은 담배 15개피를 한꺼번에 피는 만큼 해롭다. 자신이 담기조차 힘든 외로움은 타인을 향한 혐오로 드러나기도 한다.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플랜75는 요양원 이용인들에게 총기난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극우청년이 남긴말로 시작한다. 영화는 2016년 장애인 시설에서 근무했던 직원이 입소자들을 대량 살인한 쓰구야마유리엔케라 불리는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짧지만 강렬했던 영화 속 극우 장면은 현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은 어느덧 시대정신이 되었다.  범행을 저지른 청년에게 자신들의 세금을 앗아가는 노년은 효용성 없는 사람은 무임승차자로 살 가치조차 없는 사회에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다.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몸은 낙인이고 자유롭게 살수 없는 근거가 되었다.  쓸모있는 인간이 되기위한 노력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요건이 되었고 취약함이 드러날수록 루저’로 통하는 세상이다.

 

돌봄의 핵심 취약함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자와 만남을 통해, 타자의 취약성에 부름을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가 된다' 이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다. 레비나스는'인질로서의 취약성'이라는 말로, 버틀러는'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다. 혹은 우리는 이미 타자에게 양도되어 있다'는 말로 윤리적 주체의 깨어남을 표현한다.....나와 타자는 모두 인간으로서 취약성을 공통분모로 갖는다.' -‘돌봄과 인권

 

철학자 레비나스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으로 취약성을 이야기 한다.

국립국어원에 취약하다를 검색하면 무르고 약하다고 정의되어 있다. 적자생존의 세계에 무르고 약한사람은 취약한 사람으로 읽힌다. 인간의 기본적 조건은 감출수록 더 이 세계에 적합한 사람으로 보인다. 취약함을 약점으로 여기며 감추면 외로움의 두께는 더욱 두터워진다. 은둔청년, 고립사와 같은 사회적 현상은 이 사회가 만든 외로움의 반영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의 취약함을 마주하며 마음과 몸의 엮임을 통해 진정한 자신이 되어간다.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의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돌봄이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도움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노년의 과정은 장애인이 겪는 과정과 유사하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우리는 다양한 돌봄을 마주한다. 돌봄없이 생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간단한 원칙을 기억한다면 돌보는 행위는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조건임이 자명하다.

 

누군가의 필요를 말없이 채워주는 돌봄은 숭고해 보이지만 정작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이들에게는 죽을때까지 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노동이다. 돌봄을 통해 사람들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 부모님의 노화로 인해 생기는 다종다양한 슬픔과 어려움. 어떤이들은 자녀와 부모 돌봄을 위해 자기 인생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돌봄에 연루된 사람들은 사연을 갖고 있다.

돌봄과 연루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맡을 돌봄을 누군가 떠안고 있을 확률이 높다. 돌봄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돌보는 보호자도 아이의 존재로 인해 얻는 보람과 기쁨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호적이다. 거동할 수 없는 노년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의 위생을 책임지는 돌봄자의 노동 강도는 갑절로 힘들다. 상호간의 긴밀한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돌봄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불평등한 구조를 만드는 조건이 된다. 돌봄은 다양하게 관계맺는 인간들 사이에 타협과 적절한 양보사이에 춤을 추듯 일어나고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의 형태는 액체처럼 여기저기 스며든다. 

 

돌봄의 장벽

본격적으로 타인의 돌봄제공이 필요한 시기가 닥치면 돌봄은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싶은 짐으로 변한다. 돌봄은 경제적 가치와 비효율성 때문에 그동안 가족안이라는 단단한 테두리안에서만 정당성이 발휘됐다. 가족안의 돌봄은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고 누군가 생을 마감해야 해방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이미 우리가 경험한 코로나로 돌봄의 비대칭은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 점차 늘어나는 노년은 생산성, 효율성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위해 시설을 택한다. 부정의한 돌봄시스템 속에 가족과 시설을 넘어 다른 돌봄의 상상력은 시대적 요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같은 시도가 있지만 행정의 효율성과 예산절감등의 문제로 존엄한 돌봄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어려워보인다.

단단한 삶의 저자 아스토미 아유무는 우리가 힘들 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립이 가능하다고 했다. 거미줄처럼 엮인 우리의 다양한 관계들은 나와 너를 단단하게 만든다. 가족의 경계를 넘어 내 이웃, 일하다가 다친 노동자, 지구 반대편에 고통당하는 팔레스타인과 비인간존재의 안위를 생각하는 마음은 마구잡이로 엉키고 가로 지른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회가 간과할 때 취약함은 사각지대로 나타난다. 만들어진 취약함은 구조 속에 발견되어야 하는 사회의 책임이다.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는 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 가족만이 나를 돌볼 수 있다는 다양한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돌봄에 대한 인식과 행동의 변화,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시민으로서 아무나 돌볼 수 있는 상상력과 누구나 돌봄을 권리로 주고받을수 있는 돌봄권은 장기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과제다. 사회적 안전망이 두터울수록 누구나 아무나 돌볼수 있는 관계의 영역을 점점 더 크게 그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

플랜75’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려는 사람들이 있다. 15분동안 미치는 나리미야에게 쉽게 꺼내기 힘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상대방이 궁금해진다. 이용인과 접촉을 금하는 내규를 어기고 만난 시간은 상담사 나리미야에게 구체적인 사람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히로무가 삼촌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죽음의 건물에서 탈출한 용기는 삼촌의 집에서 보낸 두사람의 시간에서 비롯됐다. 히로무는 삼촌을 만나며 플랜75라는 제도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지 목격했다. 그는 외국인노동자 마리아를 만나 이미 플랜75를 통과한 삼촌을 산업폐기물장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모실 수 있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국민이 슬픔의 감정을 공유하고 여기저기서 애도와 도움의 손길이 오갔다.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어떻게 그토록 많은 국민이 그토록 오열하며 아팠던것일까. 배안의 아이들은 내 아이, 내 조카, 내 이웃의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만남을 통과한 상상력은 만나지 못한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시킬 수 있다. 만남과 돌봄이 얼마만큼 다양하게 생동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외로움은 구조와 관계 속에서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 어떤 손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돌봄이 필요한 누군가를 나의 일부와 연결시킬 수 있는 상상력을 가동시킨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이전과 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