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상임활동가 와플
코로나 위기를 맞으며 나타난 ‘돌봄과 인권’은 여성의 영역에만 머물렀던 돌봄 문제를 모두의 권리와 책임으로 전환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토대와 핵심고리는 취약성이다. 생물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취약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 이야기되는 취약성은 낙인과 배제를 담는 언어로 인식된다. 국가는 노숙인, 미혼모 등 다른 사회적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도움받을 자격을 요구한다.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증명하며 수치심을 감수한다. 사회구조와 권력의 불평등으로 만들어진 취약성은 인권의 간섭이 필요하다.
취약한 인간이 존엄함을 나타낼 수 있는 행위는 돌봄이다. 돌봄은 일방적으로 돌봄자가 피돌봄자에게 주는 행위가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피돌봄자를 돌보는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폭력이 일어나는 가정에 가해자를 돌봐야하는 상황에 놓인 피돌봄자에겐 돌보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폭력적인 가족구성원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국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돌봄자가 피돌봄자에게, 때론 피돌봄자가 돌봄자에게 행해지는 복잡다단한 시설 속 갑을 관계는 서로를 향한 주도권이 아닌 연민의 마음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생산뿐 아니라 돌봄속에서도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돌봄이 행해지려면 누구나 돌볼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나 먹고살기도 바쁜 상황이다. 그렇다고 불평등한 돌봄의 상황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도미노 게임은 멈출 수 없다.
‘제대로 된’ 돌봄 관련의 법체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안에 돌봄에 대한 정의와 상상이 먼저 공유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들봄은 특정 가족구성원이 떠안아야 하는 영역이 아닌 누구나 함께 나눠 가질 수 있는 시민윤리로서 변화를 꿈꾼다. 저자는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하려는 의도로 ‘누구나’가 아닌 ‘아무나 돌봄’이라 단어를 선택했다. ‘아무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지구 끝의 타자로 향한다. 돌봄은 국가의 책임과 더불어 누구나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역량이 되어야 한다.
돌봄과 인권강좌를 듣고 공부하며 아이들을 낳고 양육한 지난 시간이 종종 떠올랐다.
첫아이 출산 후 처음으로 아이와 단둘이 방안에 마주했을 때 내 팔길이보다도 작은 사람을 보며 그토록 연약한 생명을 지켜야 하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육아서적을 꼼꼼히 읽거나 강좌를 듣고, 이미 낳고 키운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전은 만만치 않았다. 아이의 열이 떨어지지 않을 때 밤새 미지근한 물에 가재수건을 적셔 몸을 닦아주며 ‘애가 닳는’는 체험을 했고 이유식을 만들며 야채 다지기 선수가 되었다. 이후로 두 번의 출산을 통과하며 집에서 논다는 게 얼마나 거짓말인지 몸으로 느꼈다. 살뜰하게 집안일을 해내지 못함에도 하루는 너무 빨리갔다. 나에게 닥친 상황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억울했다. 얼마전 교육현장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여성분은 인지저하증에 걸린 어머님을 집에서 간병하며 교육에 참여하셨다.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나가서 일해야 하는데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니 쉽지가 않네요. 운명인줄 알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더 열심히 일할걸 그랬어."
개인이 가진 돌봄의 감각은 돌봄노동을 경험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억울함이나 고단함을 연결시킨다.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이야기는 돌봄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겪은 노동의 의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하지만 여전히 집안일과 양육의 주담당자는 엄마다. 26년째 oecd국가 중 남녀 임극 격차 1위인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일이 가끔 아득하지만 천군만마와 같은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