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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소식/소식지 : 온수다

[온다 세미나 후기] 우리 모두의 품위를 위하여

우리 모두의 품위를 위하여

『품위 있는읽고

 

 

 

이세훈(인권교육 온다 활동 회원)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화성이고 출근해야 하는 사무실은 서울에 있다. 우리 집에서 사무실까지 출근하는 경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경로는 집 앞에서 사당가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장점은 편하다. 단점은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다. 두 번째 경로는 수원역으로 가서 전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장점은 저렴하지만 단점은 사람이 너무 많다. 셋째는 개인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장점은 편하고 쾌적하다. 단점은 비용이 꽤 발생한다.

 

문제는 두 번째 수원역에서 전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출근 때도 사람이 많지만 퇴근할 때는 정말 ‘지옥철’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플랫폼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기다리다가 억지로 억지로 몸을 열차 안으로 들이밀면 그야말로 옴짝달싹할 수 없다. 원치 않는 신체접촉에 원치 않는 냄새까지 내가 원하지 모든 것을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신경은 온통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 조금만 내 어깨를 건드려도 미움이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진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몸을 돌리기조차 힘든 현실이 내가 인간이 아닌 짐짝 취급받는 느낌이 든다. 한번 쌓아 올리면 그 모양 그대로 목적지를 가야 하는 그런 짐짝 말이다.

 

(성폭력을 제외하면) 열차에 탄 누구도 이런 상황이 즐겁지 않다. 심지어 서로가 서로에게 불쾌감을 준다. 열차에 탄 어느 누구도 불쾌감을 줄 의도는 없다.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불쾌감을 주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은 원거리를 출퇴근하거나 볼일을 봐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상황’ 그 자체가 서로를 기분 나쁘게 하는 존재면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최소한 인간이 가져야 할 품위를 손상당한 느낌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을 매일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사회’다. 만일 수원역 전철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 직장이 자신 집 근처라면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서로를 불쾌히 여기는 일도 짐짝 취급당하는 일도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을 만나는가에 따라 서로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그런데 그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대부분 ‘사회’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 어떤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하는가 여부는 그 사회 대다수 구성원에게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고 서로를 불쾌히 여기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 2020년 4월 29일 경기도 이천에 있는 물류센터 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38명이 돌아가시는 참사가 벌어졌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2008년 1월 7일에 공교롭게도 경기도 이천에서 냉동창고를 짓다가 비슷한 이유로 화재가 발생해 40명이 돌아가시는 사고가 이미 있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가? 문제는 건설사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화재에 취약한 자재를 사용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보다는 공사 기간 단축에 초점을 맞춰 공사하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돈을 위하다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공사현장에서는 안전을 말하는 사람은 천덕꾸러기가 된다. 사람 생명을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공사를 하자고 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심지어 여러 사람의 임금을 떨어트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니 서로는 서로의 돈을 위해 안전을 뒤로하고, 여러 가지 공정이 위험하게 동시에 진행되면서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더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사람보다 돈을 우선 할 때 우리는 서로를 어떤 존재로 대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떤지를 비참하게 증명한 것이다. 이 사회가 건설노동자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서로가 인간적으로 대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는 않았을까? 일찍이 우리는 이런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라고 칭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고 서로를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해주는 사회 이것이 바로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사회, 인권이 사라진 사회다. 인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소한”이라고 정의할 때, 인간으로서 품위가 없다면 이 사회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다.

 

문제는 제도가 우리 일상에서 너무 당연시되어서 이를 “모욕”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직장에서 왜 우리는 상사의 말도 안 되는 갑질을 견뎌야 하는가, 학교에서 학생들은 왜 입시를 위해 모든 인간권리를 포기해야 하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남성 임금의 68%만 받아야 하는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왜 이동권이 제한받는가, 비정규직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노출돼야 하는가, 학력이 높은 자는 왜 낮은 자를 무시하는가, 서울에 산다고 지방에 사는 사람보다 우월할 이유가 있는가 등등 이런 말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우리끼리의 아등바등 만 보고 이를 방관하고 조장하는 제도에 대해 너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눈을 돌려보자. 이제 우리 사회를 인간이 존중되는 사회 “품위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다. 출퇴근 시간조차 서로의 품위를 존중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 이것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해주는 첫걸음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