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어느 해안가에서..

내가 가진 충분히 좋은 것

몽당(인권교육온다 활동회원)

누구나 자신이 예상치 못한 시기에 맞닥뜨린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태어나거나 죽거나 하는 시간을 스스로 시계를 돌려 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일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내 옆에 서 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갈 인생에서 확실히 예측 가능한 것도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예전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연애, 결혼, 출산, 양육, 죽음 등이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순서마다 조금씩 다를 수도 있고 그 삶의 모양들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분이 가장 크게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겪게 되는 시기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청소년기에 사춘기가 온다거나, 50세가 넘은 여성에게 폐경이 온다거나, 폐경 뒤에는 사춘기보다 무서운 갱년기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도 왔다. 예기치 못한 폐경이. 내 나이 36세의 어느 날, 갑자기 왔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내 몸의 변화였다. 50세 지난 어떤 날, 과거 나의 지나온 삶을 추억하며 잘 살아온 과거의 나에게 ‘say goodbye~’ 인사를 하고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의 알림이 될 거라고 했던 내 주위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말이 의사의 설명하는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여성은 누구나 이쯤... 그 시기가 아니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시곗바늘이 나를 향해 뾰족한 광선을 쏘고 있었다. 참참참 놀이에서 상대의 물총과 내 얼굴이 같은 방향이란 걸 안 순간, 날아올 물총의 물살이 무서운 바로 그 순간처럼 돌이킬 수 없는 두려움, 그것을 내가 만나고 있었다.

‘나 정면돌파 하기로 했어.’ 드라마 「응답하라1988」에서 정환이 엄마가 자신의 폐경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선택한 부분의 장면이다. 그러나, 나는 36세의 나이에 폐경이 올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방법을 찾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남들이 말하는 나머지 인생 같은‘제2의 인생’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생각에 서글프고 힘만 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극복하려 애쓰는 시간이 지나던 어느 순간, 갑자기 ‘나 정면돌파 하기로 했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 그대로 살아가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나와 묶여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내 인생의 변화로 아파하고 슬퍼하고 행복하고 기뻐하는 모든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겨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라마 속 그 말은, 자신의 결심에 대한 선언이었다. 나도 동일하게 나와 가족에게 선언했고, 그 이후부턴 내 몸의 변화에 적응하고 마음을 위로하기로 노력했다. 그 선언은 나에게 굉장한 의미였다. 예기치 못한 변화에 대한 인정이었고, 그로부터 오는 신체의 늙음이라는 출발선에서 나를 돌보는 지난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라는 문구의 그 우리에 나를 넣어야 했고, 정말 살아야했다. 폐경 전후의 나는 같은데 달랐다. 그러나, 변치않고 바뀌지않는 것들도 여전히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이 그랬다. 무엇보다 나, 내가 있었다. 더없이 좋은 것을 내 손에 쥐고도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물론, 힘든 시기를 충분히 겪어내는 것도 나에게 필요했지만, 어쩌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시간에 그 좋은 것들을 빨리 발견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의 나는 그 터널을 지나 멀리서 회상하고 있다.)

얼마 전 「socrates express」라는 책을 보면서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 충분히 좋다’라는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나도 당신도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랑을 주고 받고 사는지,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인지, 성 정체성이 어떤지, 나이가 몇 살인지... 등을 알 순 없다. 그렇지만, 우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이 있다. 그것을 가져서 충분하다고 자랑하거나 자기변명을 하자는 것도 거기에 안주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가진 좋은 것(그것이 무엇이든지)을 발견하고 그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 그것이 ‘충분히 좋음’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나이든다는 것, 특히 늙어간다는 것이 지혜의 폭을 넓히는 것으로 이어가기를 바라고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 되길 기대한다. 꺼져가는 빛에 분노했던 내 젊은 날이, 이제 그 빛이 다른 이들의 가슴속에 타오를 것이라는 믿음과 응원으로 바뀌는 경험처럼 그런 지혜가 내게 ‘충분히 좋은 것’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때론 나의 성장과 성숙을, 때로는 위로를 담당해 주기를 기대해본다.

“난 충분히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봐요. 이런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해줘요. 게다가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뭐든 충분하지 않을걸요.”(p212)
‘socrates express’중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에서

Posted by 인권교육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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