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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소식/소식지 : 온수다

[세미나 후기] 변방에서 또 다른 변방으로..

 

변방에서 또 다른 변방으로..

 

와플(인권교육온다 상임활동가)

 

 

2022년 온다세미나 첫 시작으로 김도현 활동가가 쓴 장애학의 도전에 도전했다. 3주에 걸쳐 몽당, 여름, 그린과 톺아본 내용을 정리해본다.

 

같은 풍경도 변방에서 보는 것과 중심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 저자 김도현은 이 위치성을 시좌라 명명한다. 그는 변방에 머무는 장애에 대해 접속, 성찰, 전환, 도전으로 나누어 비장애와 장애를 나누는 간극의 원인을 이야기하며 더불어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고찰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닌,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흑인이 피부색이 아닌 차별 때문에 노예가 되었듯, 장애인은 차별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다. 손상은 장애의 원인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 WHO(국제 손상·장애·핸디캡 분류, ICIDH)에서는 장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사람의 몸에 손상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만한 이상이 존재하는 것

위와 같이 세계보건기구에서 명시한 몸의 손상은 인간의 육체를 수선 가능한 존재로 간주할 여지를 남긴다. 생각을 좀 바꿔보자. 몸을 고치는 게 아닌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고치므로 손상된 몸은 손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가령, 버스를 타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을 위해 만든 저상 버스가 예중에 하나다. 젠더는 성별이 아닌 사회적 억압과 구조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차별의 구조를 보지 못한다.

 

그동안 당연시했던 장애의 범주는 시대와 문화적 맥락에 따라 경계를 달리했다. 예전에는 혼혈인, 여성, 흑인도 장애인의 범주에 속했다. 현재 장애분류체계에 따른 범주도 완벽하지 않다. 청각장애인과 청인, 시각장애인과 시각인의 거리는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거리보다 가깝다. 농인들은 수화라는 그들의 고유한 언어가 있기에 자신들을 장애라 생각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은 왜 장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지 물음이 생긴다.

 

장애와 비장애의 애매한 경계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 우생학을 근거로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들로 배제시키기 위해 노력한 지난 역사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그곳(시설)은 안락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락함과 즐거움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평생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희망 대신 욕망‘의 작가 김원영은 그가 머물던 재활원에서 ’탈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장애를 ’할수없음‘으로 여긴 사람들이 보호와 안전이라는 이유로 시설안에 장애인을 가두고, 그들의 수동적 삶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존재했다. 그중의 한 목소리가 2017년도에 장애인 당사자들이 외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이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당사자들만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현실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콜라보로 이뤄낸 결과이기도 한다. 비장애와 장애의 범주가 아닌 서로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안의 소수성을 인지하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기치하에 한 목소리를 낸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저자이자 활동가인 김도현은 장애학의 궁극적 지향이 장애인 차별 철폐라고 단언한다. 그는 장애와 비장애의 연결성을 언급하며 우리가 장애인과 함께 해야할 몇가지 이유중 비장애인 중심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남성의 문제가 바뀌지 않으면 여성문제는 해결되지 않듯 비장애 중심의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장애 문제가 바뀌기 어렵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곁을 내주고 인식의 확장을 벌이는 일. 이것은 관계의 문제다. 우리는 각자 살아가고 있는거 같지만 결코 혼자서 살 수 없다. 비장애인이 장애문제의 한 축을 이루기에 장애문제를 직접적 연관된 존재로 인식하면 장애를 타자화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로 공동의 책임이 있다.

 

이것은 노동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그동안 우리가 생산, 이윤 중심의 노동으로 봤기에 장애인이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것을 당연하게 봤다면 노동이 이윤이 목적이 아닌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는 좋은 징조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노동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민주사회에 걸맞는 직장 분위기는 자연스레 조성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아직 요원한 일이다.

 

다시 시좌로 돌아와 보자. 결국 모든 것의 함의는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다. 비장애 중심사회는 이성중심사회와 닿아있다. 방식이 다르다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의견이 없는 것처럼 치부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자립은 절실하다. 이를 위한 의존은 그들에게 권리이다. 대선주자들이 하는 말중에 장애인의 권리를 언급한 장면을 본적이 없다. 이들의 권리는 우리의 권리와 동일하다. 우리도 의존한다. 그들도 의존한다. 함께 위계없이 서로에게 의존하며 따로 또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장애학의 도전은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며 만들어진 여성으로서의 내가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장애학의 도전은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탐구이고 내 무지에 대한 반성의 계기였다.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몽당, 여름, 그린과 자신의 입장에서 의견을 나누며 각자의 시좌를 넓힐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