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 만한 삶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싸워나가고 있는가1)
상드(인권교육온다 상임활동가)
2018년, 한국에서 난민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은 예멘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온 500여명의 난민들이 난민 지위를 신청하면서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서는 난민신청 허가를 폐지하고 개헌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고2) 무슬림에 대한 혐오 발언은 보수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부 여성들, 특히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의 난민 혐오가 드러났습니다. 한국에서 난민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이슈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1993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 발효된 이후 난민신청이 꾸준히 증가하여 2022년에는 11,539명이 난민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난민인정은 175명으로 신청자 대비 1.5%의 인정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3) 한국이 난민 문제에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불평등의 심화에 의지하는 것(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2024: 99)”이라고 말한 버틀러의 말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우리’의 삶과 생명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삶의 방식은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한편에서는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 말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애도해야 할 것이지만 죽음을 애도할 수 없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눌 수 있는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요?
이 책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2024)은 프레디리크 보름스와 주디스 버틀러가 2018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대담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담이 있었던 2018년은 수백만 명의 난민 수용 문제로 유럽 사회가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던 때입니다.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 두 철학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의 이해, 삶의 본질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를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 대담은 첫 번째 대담에서 확인된 입장의 차이를 뛰어 넘어 반성적 논의와 심화된 이해로서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에 주목하며 현실적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두 사람은 두 번째 대담에서 입장 차이를 재검토하면서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대담의 중심 질문은 ‘우리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런 구분을 하는 데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으로 택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입니다.
프레데리크 보름스는 비판적 생기론자로서, 필수적 생존 요건과 돌봄의 윤리를 강조합니다.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은 돌봄이 가능한 조건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생명의 규범성에 기초해서 생명 지속에 위협되는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특히 돌봄이 부족하거나 왜곡될 때 발생하는 삶의 위기를 주목합니다. 생명을 돌보고 유지하는 정치적 실천을 기반으로 생명 내적인 죽음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 애착과 침해, 돌봄과 권력이라는 삶과 죽음이 뚜렷하게 대립된다는 양극성을 주장하면서 삶과 애착, 돌봄에 찬성하고 죽음과 침해,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명 그 자체의 ‘내재적 규범성’을 강조하며 음식, 물, 돌봄, 안전처럼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하지 않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명확한 생명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한지 않은 것이고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주체가 경험하고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살 만한 삶의 객관적인 조건을 중시하고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버틀러는 삶의 실존적 ‘위태로움’이나 사회적으로 차등 할당된 ‘위태성’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몸의 의존성과 관계의 상호성을 사회적 존재론의 기반으로 보았습니다. 삶을 살 만하지 않게 만드는 것에 대한 비판 활동이 요구되는데,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규범을 비판하고 젠더, 인종, 성적 지향성, 민족, 국가 등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특정 집단의 배제와 그로 인한 삶의 위태로움을 비판하였습니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외부적인 사회정치적 경향과 운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정치적 실천의 면에서 위태로운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역학을 변화시키기 위한 저항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12.3 계엄령 이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발언과 구호, 요구 등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특히 20, 30대 여성들의 자기 위치성에 대한 발언과 차별의 금지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동안 비가시화 되었던 시민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보름스의 죽음과 삶에 대한 양극성과 다르게 버틀러는 죽음과 삶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거나 서로 겹치는 양가적인 것이며 삶을 어떻게 경험하고 서술하는지를 중시합니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적은 샤를로트 델보를 말합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해서 살 만하지 않은 삶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버틀러는 보름스가 강조한 생명 자체의 규범성 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상호주체성이 중요하며 삶과 죽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보다는 살 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 주체의 표현과 활동에 주목합니다. 예컨대 바다에 버려진 이민자들, 무기한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 군사 분쟁으로 폭격당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데 ‘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을 점점 더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인간의 파괴와 궁핍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어휘에 속하는 용어이며 사람들이 결코 완전히 망가지는 일은 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사고에서 온 국민이 겪었던 충격은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으며 오송 참사, 이태원 참사, 아리셀 참사와 같은 재난이 벌어질 때마다 동시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재난인 것입니다. 재난은 일어난 그 시점에만 벌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부터 현재까지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틀러는 생명 자체의 규범성 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상호주체성’이 중요하며 삶과 죽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보다는 살 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 주체의 표현과 활동에 주목합니다. 한 삶의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므로 어떤 삶이 살만한지를 판단할 때 그 삶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악셀 호네트가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인정투쟁』, 2011: 15)이라고 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중적 상황에서도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정되고 보호받는지가 두 삶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틀러, 보름스의 입장의 차이를 확인했었던 첫 번째 대담과는 다르게 2022년 이뤄진 두 번째 대담에서는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두 사람은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상황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을 바라보면서 글로벌 의료 서비스의 확대 등의 현실적인 대안,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고 취약성에 기반한 연대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돌봄은 단순히 생명 유지의 조건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주체성의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돌봄은 삶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서로 보완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살 만한’ 삶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버틀러와 보름스의 대화를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2.3 계엄령을 거치면서 보여진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 반 민주주의 정치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며 광장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지, 한국 사회가 어떤 민주주의로 가야 하는지 지향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약 6개월의 시간동안 광장의 민주주의는 상호주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나의 삶이 당신의 삶과 우리의 삶과 연루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세월호, 이태원, 아리셀 참사대책위,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노동자의 고공농성과 세종호텔 고진수 노동자의 고공농성,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인 김형수4)의 고공농성은 싸움을 하고 있는 노동자, 대책위 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가 살 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싸움임을 버틀러와 보름스의 두 차례 대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고 있는 지금, 혐오와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우리’라는 범주를 점차 확장하고 공감의 동심원을 확장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1) 이 글은 상드가 대학원 청강을 위해 제출한 책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2024)에 대한 서평으로 작성된 글을 바탕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2) 「한겨레」, 2018.6.18.,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 500명, 무슬림 혐오에 내몰리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849580.html (최종검색일 2025년 3월 10일).
3) 난민인권센터(2024), 『한국사회의 난민인권 보고서』, [표-1] 연도별 난민신청 및 심사단계별 인정현황(1994-2022), https://nancen.org/2396 (최종검색일 2025년 3월 10일).
4)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인 김형수님은 지난 6월 19일(목) 오후 고공농성을 해제하였습니다. 한화오션 하청 노사가 17일(화) 중단되었던 단체교섭을 재개하여 2024년 단체교섭이 타결되었습니다.
'활동 소식 > 소식지 : 온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온수다 소식지 38호] (0) | 2025.10.27 |
|---|---|
| [온수다 소식지 37호] 상생하는 삶은 아름답다. (1) | 2025.06.18 |
| [온수다 소식지 36호] 민주주의 봄맞이를 위한 중요한 시기 (0) | 2025.03.18 |
| 다시 만들 세계에서 필요한 인권교육을 새롭게 만들어가기 위한 워크샵, 2025 인권교육 고개넘기 “뚝딱 뚝딱 새로 쓰는 인권교육의 문법: 적용사례 만나기” (0) | 2025.03.17 |
| [이 한장의 사진]눈물버튼 (0) | 2025.03.16 |